[카무오키]귀서(歸棲)





01.


 맨피부에 차가운 공기가 닿는 느낌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고 자연스럽게 옆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허우적거리며 아마도 곤히 자고 있을 너를 찾는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건 식어버린 이불의 감촉뿐. 그제야 나는 눈을 뜨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묶지 않아 눈앞에서 이리저리 엉킨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비어있는 너의 자리를 내려다본다. 가슴 속 깊은 곳부터 무언가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몇 시간 전, 평소와는 달리 적극적이던 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목을 끌어안던 가느다란 팔, 허리를 감싸던 다리, 의아할 정도로 내 이름을 불러 대던 너의 높은 목소리를.
 너는 내가 없는 동안 무얼 생각하고 무슨 준비를 했던 걸까. 한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예감이 틀렸길 바라며, 나는 침대를 내려갔다. 벗어놓고 정리하지 않은 옷가지들 속에서 네 옷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상하게 힘이 빠져버려, 휘청이는 다리를 이끌고 방을 나선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해 조금씩 환해지는 거실 속에서, 아무것도 없었던 유리 탁자 위에 놓여있는 하얀 종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바닥만 한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카무이」


 익숙한 필기체로 쓰인 그 세 글자. 그것을 보는 순간 수많은 너의 말들이, 너의 감정들이, 종이를 쥔 손끝을 통해 내게 흘러들어왔다. 작별 인사도, 원망도, 그 어느 것도 아닌, 그저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지만, 너는 그 이름 속에 모든 것들을 심어놓았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민했을 너를 생각한다. 결국엔 어떠한 문장도 떠올리지 못해, 겨우겨우 펜을 들어 내 이름만을 끄적였을 너를 생각한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탁자 옆에 놓인 의자를 집어 던졌다. 무언가가 망가지는 소리가 집 안을 울린다. 나는 그것이 의자의 소리인지, 아니면 내 심장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너는 그렇게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02.


 "며칠만 재워줘요."



 당당하게 내뱉은 말에, 눈앞의 남자는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속으로 깊게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응시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대신 끌고 온 캐리어를 현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 히지카타 씨는 '소고' 하고 낮게 이름을 불러 나의 행동을 멈추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복도에 혼자 남게 된 히지카타 씨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내 집인 마냥 신발을 벗고 거실로 발을 옮겼다. 집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쓴 담배 향기가 퍼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깐이라 금방 익숙하게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히지카타씨의 손가락엔 담배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는 날을 힐끗 쳐다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무언가를 따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뒤 주방에서 나온 히지카타 씨의 양손에는 똑같이 생긴 찻잔이 들려 있었다.


 "마시고 가."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단호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밀어진 찻잔을 받아들었다. 8시 30분. 찻잔 너머로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바라보고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동시에 이른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저를 내쫓지 않고 들여 보내준 이 남자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 뭐 반 이상은 이쪽의 억지였지만.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밀려오는 두통에 엄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무작정 나오긴 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막막할 뿐이었다.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찾아낼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덕분에 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했다. 처음 핸드폰을 샀을 때부터 사용했던 전화번호, 몇 년 동안 일해 왔던 직장, 그리고…녀석과 함께했던 안식처.
 그래. 그곳은 안식처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헤어졌냐?"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나는 어딘가 먼 곳까지 가버린 의식을 끌어왔다. 잠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곰곰이 머릿속으로 문장을 떠올리다가,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집 나온 것 같길래."

 그는 소파, 즉 내 옆에 앉는 대신 바닥에 깔린 융단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차를 한 입 마셨다. 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헤어졌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나는 내가 그 녀석을 떠남으로써 그 녀석과 헤어졌다. 하지만, 그 녀석이 이렇게 쉽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헤어짐은, 사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다.


 "…재워줄 거죠?"
 "……."


 히지카타 씨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들고 온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난 설핏 웃으며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03.


「…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아아,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없길래."


 혹시 연락 오면 알려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액정에 '히지카타 토시로'라고 정 없이 저장한 이름이 뜬 걸 잠시 내려다보다가, 탁자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오키타가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연락한 사람이었다. 그다지 친분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오키타와 가까운 사람이란 이유로 알고 있던 남자였다. 그만큼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금 오키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그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연락하기 전에 다른 곳에도 연락해보았었지만 비슷한 답변들뿐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오키타의 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어있었으며, 그의 일터에 전화해 보아도 일을 그만두었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초조해져 저도 모르게 깨문 손톱에서 피가 났다. 이토록 짜증 난 적이 없었는데.


 왜일까.


 그가 요즘 내게 지쳤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달래준다면 다시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날 떠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떠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나도 아니었다. 오키타는 그런 나에게 '집착'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지만, 나의 행동은 연인으로서 당연한 것들이었다. 오히려 나로서는 그를 상당히 풀어두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평소에 집 밖을 나가 일을 할 수 있었으며,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남자와 꾸준히 연락할 수 있지 않았나?
 나는 결국 다시 핸드폰을 들어 아부토의 번호를 찾았다. 잠시 뒤 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자, 핸드폰 너머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뚝 하고 매정하게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난 여유롭게 그의 정보를 기다렸다. 그제야 피가 난 손가락이 눈에 들어와, 응급 상자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붙이고, 그 김에 침대 옆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빗을 들어 엉킨 머리를 빗은 다음 하나로 땋아 묶는다. 머리를 묶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조금 쓸쓸했지만, 이런 생활도 며칠 안 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집 안을 정리하고, 욕실에서 씻고 나오면 아부토에게서 파일이 도착했다. 나는 컴퓨터를 켜서 핸드폰을 연결하는 동안 느긋하게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다. 잠시 뒤 컴퓨터에 파일을 복사해서 열어보니 여러 개의 동영상이 담겨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의 동네 CCTV 영상이었다.


 곧 다시 만날거야.


 영상 속에서 캐리어를 끄는 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미소지었다.













----------------



그리고 다시 오키타를 찾아온 카무이가 평생 집 안에 두고 먹여살리기로 다짐했다나 뭐라나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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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 흩어진 고백



 "히지카타 씨!"
 
 언제나처럼 무사할 거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오키타 대장이…"
 "…폭발하면서 소리가…"
 "지금 병원에…"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그 말'을 하는 것을 망설일 수 있었던 거겠지.

 -

 빨간 불빛이 반짝이던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던 순간, 난 이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있어서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거. 나도 있으니까. 아직 죽으면 안 되는 이유. 미처 듣지 못한 말이 남아 있어서. 죽기 전에 꼭 한번은 들어야겠다, 했거든.
 그래서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신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기쁨에 주변 상황이 어떤지도 보이지 않았다. 야마자키가 호들갑스러운 몸짓으로 병실을 나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멍청한 얼굴로 들어온 그에게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들리지 않아.

 "히지카타 씨……."
 "소고……."
 "지금, 내 말 들려요?"
 "소고."
 "좀 이상한데. 나, 말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 안 나와."
 "……."
 "아직 충격이 커서 그런 걸까? 근데 되게 조용하네요.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히지카타야."
 "소고……."
 "아무 말이나, 아무나, 해보라고!"

 바보같이. 입만 뻐끔거리면 뭐해요. 왜, 내가 살아있어서 놀랐어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말이 없는 거야? 쳐다보지만 말고 말을 해줘. 아무 말이나 다 좋으니까. 아니라고 해줘. 내가 왜 죽지 못했는데. 차라리 내가 말을 못하는 거라고 해줘. 
 
 아아. 신이시여.
 결국 저를 이렇게 버리신겁니까.

 -
 
 "폭발할 때 바로 그 옆에 계셔서…폭발음 때문에 청각에 무리가 갔다나 봐요."
 "회복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건가.
 
 병실에서 한참을 소리 지르던 녀석은, 다급하게 달려온 의사에게 진정제를 투여받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히지카타야, 나,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지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 같은데,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너의 울분의 찬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이것조차도 미안하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데, 나는 아직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죄스럽고, 괴롭다. 무엇보다도, 언젠간 해줘야지 하면서도 용기가 없어 너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다음에, 다음에. 이렇게 미루다가는 평생 못하겠군, 이라고 장난처럼 말했던 것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를 꾸짖는다. 이제는 네가 살아있음에도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네가 소리를 듣는 법을 잃어서, 나는 말을 하는 법을 잃었다.

 "…장."
 "……."
 "부장!"
 "아…, 야마자키."
 "오키타 대장, 깨어나셨답니다."
 "상태는?"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의 병실 앞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희망을 품었다. 이번에도 너의 악질적인 장난이길 바랐다. 문을 열면, 네가 그 어느 때처럼 내게 '몰래 카메라였습니다-'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기를 바랐다. 그래도 난 너의 장난을 용서할 수 있을 터였다. 감사하다며 네 손을 잡고 무릎 꿇고 기도라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인 너의 메마른 표정은 이것이 괴로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소고……."

 너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 네 어깨에 손을 올리니, 흠칫하고 놀란 너는 두려움을 품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나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너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리고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너의 약한 모습이 나의 폐부를 찌른다. 마치 온몸의 장기를 쥐어 비트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나는 몸부림친다. 아아. 소고. 내가 너한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사랑해."
 "……."
 "사랑한다, 소고."
 "……."
 "사랑해, 사랑한다."
 "……."
 "사랑해, 널 사랑해."
 "……."

 너를 껴안는다. 껴안은 채로 너는 듣지 못할 고백을 한다. 나의 고백은 너에게 가지 못한 채 공중에서 흩어져 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쉼 없이 고백을 토한다. 이토록 쉬운 말을 왜 그동안 망설였을까. 이렇게 몇 번이고 할 수 있던 말을, 왜 한 번도 너에게 해주지 못했던 걸까.

 "줄곧 너를 사랑했어."
 "…뭐 하는 거예요, 히지카타 씨."
 "너에게 꼭 말하고 싶었어."
 "왜 당신이 옆에 있는데도 혼자인 느낌인 걸까."
 "바보같이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
 "보이지 않는 유리막에 갇힌 것 같아요."
 "네가 이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뼈가 산산 조각이 난 건 괜찮은데, 소리 하나 못 듣는 게 이렇게 불편할줄이야."
 "이제서야 말해주는 나를 원망해."
 "들려요? 설마, 나 청력을 잃었다고 말도 못 하게 되어버린 건가?"
 "사랑해. 평생을 사랑해."

 나의 사랑은 너였다. 너는 나의 사랑이었다. 
 때문에 네가 귀머거리가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흩어진 고백이 갈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

 급한 마무리..대체 뭘 싸지른건지.
 그냥 갑자기 청력을 잃은 오키타가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었던 장면들
 1. 내가 말하는 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는다고 울부 짖는 오키타.
 2. 고백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며 오키타를 껴안고 쉼 없이 고백하는 히지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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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 헤어지는 법
 _조각글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으나, 사랑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애정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그 눈빛은 금세 희뿌옇게 흐려지고는 했다. 매일을 같이 다니면서도 차마 손을 잡을 수 없었고, 몸을 섞으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헤어지자."

 네가 날 그렇게 올려다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너는 그런 날 사랑했고, 그런 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고, 때문에 애정과 함께 상처를 나누었다. 그 상처는 날로 깊어져만 가고, 더 이상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다른 연인들이었다면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나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듯했다.
 너희 남매는 왜 날 이리도 힘들게 만드는지. 너는 왜 그녀를 닮아서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건지. 나는 왜 또다시, 너를 사랑하게 된 건지. 내가 정말 사랑했던 건 그녀였는지, 너였는지.

 "우리가 언제는 사귀었던 것처럼 말하네요, 히지카타씨."
 "……."

 너는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시 한 번 헤어지자? 하고 중얼거린다.

 "사귄 적이 없던 사람들이 헤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너는 나를 비웃는다. 나도 나를 비웃는다. 우린 우리의 관계를 비웃는다. 그래, 우리는 어쩌면, 헤어지는 것조차도 할 수 없던 걸지도 모른다.





 -

 너무 괴로워서 그만 헤어지자고 했더니
 언제 사귄 적 있었느냐고
 사귄 적 없는 이들이 헤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비웃듯 다그친다
 (유안진, 타동사에 얹혀서)

 글귀 봇에서 보고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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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witter.com/OS861215/status/658113952824496129



[긴오키] 어느 겨울



 후우. 목도리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린 남자가 가만히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공중에 퍼졌다. 그리고 그 뒤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아니다. 이젠 흐릿하지 않다. 좁은 골목길에 기대어 있는 소년의 모습은 선명히 보였다. 어젯밤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여전히 길 위에 남아있을 만큼 추운 이 날씨에도, 제복 말고는 그 어떠한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저 소년은. 그래. 내 것이 될 수 없는 저 소년은.
 처연한 감정이었다. 남자는 감히 저 소년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다.

 "형씨."

 이제야 남자를 발견한 듯, 소년은 가만히 남자를 불렀다. 형씨, 라.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호칭이었다. 긴토키를 형씨라 부르는 건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익숙한 호칭이지만.
 
 '뭘 기뻐하고 있는 거냐, 나는.'

 피식 웃어버린 긴토키는 머리를 긁적이며 오키타에게 다가갔다. 사실은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오키타의 앞에서 멈춰 섰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지나가세요."

 저 때문에 지나가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오키타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골목 옆에 바짝 붙어섰다. 그게 아니었는데.

 "땡땡이인 거냐, 아니면 잠복?"
 "땡땡이였으면 이 날씨에 여기 있지도 않았겠죠."

 어색한 공기가 그들을 메우고 있었다. 한때는 그래, 시간만 나면-대체로 오키타의 땡땡이였다- 음담패설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던 그들이었다. 서로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소년은 다른 이를 사랑했다. 제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도 사랑하고 말았다는 소년. 긴토키와의 행위는 단지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소년의 누나가 죽은 이후로 끝났다. 소년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소년이 남자를 찾아왔던 것이니, 남자가 따로 소년을 찾아갈 명분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더라도 오랜만이네요. 오냐. 같은 시시한 인사말이 전부였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래. 소년은 이 하얀 머리의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가 긴토키를 올려다봤다. 그 표정에 의문이 한 가득이다. 왜 지나가지 않느냐고 묻는 듯이. 이미 당신과 나는 끝났는데.
 
 "춥겠다."

 세금 도둑 주제에 돈도 없냐. 너흰 왜 사계절 내내 같은 옷이야? 긴토키가 중얼거리며 제 목도리를 풀어 오키타에게 둘러 주었다. 미간을 찌푸린 오키타가 긴토키의 손을 낚아채 목도리를 다시 풀어버렸다.
 
 "목도리는 숨이 막히는 감각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해요."
 "아아."
 
 긴토키는 멋쩍은 표정으로 오키타가 내민 목도리를 다시 받아들였다. 다시 제가 두르기도 뭐해서 손에 걸쳤다. 더 이상은 말 이을 재간이 없다. 예전이었다면 질척거리는 농을 소년의 귀에 속삭여줬을 텐데. 그럼 소년도 지지 않고 제 허벅지에 다릴 두르며 나이에 맞지 않는 수위 높은 발언을 했을 테다. 그다음엔….

 "형씨?"

 오키타의 부름에 긴토키는 흠칫 놀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버렸다.
 한동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미세하게 나오는 입김이 그사이를 채울 뿐이었다.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건 소년만이 알 것이다. 다만 그것이 후회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형씨, 시간 있어요?"
 "뭐?"
 "지금부터 하려고요. 땡땡이."

 -

 오키타는 긴토키를 조용한 카페에 데려갔을 뿐이었다. 선심 쓰듯 남자를 위한 파르페 두 개를 시키고, 저는 오렌지 주스 한잔을 시킨 소년은 턱을 괴고 남자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솔직히. 반반하게 생기긴 했다. 저 썩은 눈깔만 아니라면. 아니, 저 죽은 눈동자도 침대 위에서는 밝은 빛을 띠더라지. 아, 백발은 그래. 이런 날씨엔 좀 그렇다. 가뜩이나 흰색 옷을 입고 다니는데, 머리카락까지 흰색이니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아니다. 꼭 다른 사람에게까지 보일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오키타는 아차,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안 만나려고 했는데.

 그래, 처음엔 위로였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소년은 다른 이를 사랑했다. 누님이 사랑하는 남자였다. 제 상관이었다. 매일 같이 죽어버리라고 말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히지카타 또한 제 누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래서였다. 해결사니까. 망할 상관에 대한 감정을 대신 위로해 줄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와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다른 감정이 생겼다. 입으로는 저질 농담을 하면서도 그는 소년이 너무 소중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숨기려고 했던 거 같지만, 워낙 눈치가 빨랐던 탓에 소용이 없었다. 그래, 그는 저를 사랑했다. 소년은 그것을 알면서도 못된 아이답게 모르는 척했다. 아직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그는 섹스파트너.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년은 외로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조금씩 소년에게 사랑을 넘겨주었다. 그도, 소년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조금씩. 나중엔 그 사랑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사랑이 소년의 사랑을 헷갈리게 할 정도로.

 그리고 누님이 세상을 떠났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소년은 두 남자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님을 신경 쓰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사람인데. 유일하게 편하게 기대어 쉴 수 있었고, 유일하게 지켜주고자 했던 사람인데. 고작 연애를 위한 사랑 때문에, 나는 내 유일한 가족을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냈나.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느 때와 같이 히지카타에게 저주를 걸었고, 긴토키는 더이상 사적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뒷늦게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형씨."
 "오늘 그 소리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형씨를 잠깐 좋아했어요."
 
 파르페를 뒤적이던 손이 멈췄다. 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뭐?"
 "아니,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몰라요."
 "어이, 지금 무슨…."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뭔가를 말하려던 긴토키의 입이 닫혔다. 그래, 방금 기대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못 알아들은 것처럼 반응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는 제 마음을 소년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했으니까. 하지만 오키타는 그럴 기회조차 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에요."

 긴토키에게 못 박듯이, 혹은 저 자신이 다짐하듯이 한 번 더 내뱉은 오키타가 고개를 들어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마웠어요, 형씨."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도 네 녀석을 사랑했다고? 그게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이미 소년은 감정을 정리했다는데. 소년은 방금, 남자가 더는 짝사랑 조차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사랑했다가 아니야. 사랑해. 아직도.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긴토키는 오키타에게 씩 웃어 보였다.

 "어려운 일 있으면 찾아와. 단, 이제부터는 지인 할인 이딴 건 없을 거다, 이 매정한 녀석아."
 "예."

 오키타도 긴토키가 짓고 있는 표정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카페를 나섰다. 홀로 남은 남자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창밖에, 눈 덮인 거리를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아니, 이것조차도 착각일 것이다.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남자는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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