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x14

*연반 몹레

*사망 표현 있음

 

 

 

 

 

01.

 마른 풀잎의 냄새가 났다. 뒤에서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아슬하게 옆쪽으로 자전거를 탄 아이가 스쳐 지나간다. 작아져 가는 검은 교복을 바라보던 시게오는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보았던 교복과 같은 옷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가 강둑에 앉아있다. 저물어가는 햇빛에 아이의 머리가 금빛으로 빛났다. 그 모습에 시게오는 검정 일색이었던 자신을 생각한다. 동시에 회색빛 정장에 분홍색 넥타이를 매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때의 남자와 같은 나이가 된 시게오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당신은 검은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저와는 다르게.
 검은 교복을 입은 아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 그 색에 묻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단정함과 우울한 기운 모두를 가진 아이. 시게오는 비어버린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아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구두에 짓이긴 잡초들이 소리를 내어 아이의 시선을 끌었다.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시게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걸어야 할까.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단어들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저도 모르게 뱉었다. 괜찮아?

 "누구세요?"

 어울리지 않는 질문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물론, 떼어놓고 본다면 아이의 질문은 어울리다 못해 옳았다. 수상한 사람이 말을 걸면 즉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어렸을 적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말이 떠올라 시게오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엔 둘 뿐이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28살의 남자와 검은색 교복을 입은 14살의 아이. 시게오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카게야마, 시게오라고 해."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답한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잡초들을 털어냈다. 가방까지 주워든 아이가 금방이라도 등을 돌려 사라질 것만 같아 시게오는 팔을 뻗었지만 차마 붙잡을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의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었다. 어떡하지. 다급해진 마음에 시게오가 손을 내려 정장 안주머니를 뒤진다. 손끝에 종이 한 장이 잡혔다. 아이를 향해 내밀자, 아이는 여전히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건네진 종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글자를 읽어내려간 그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진 건 당연했다.

 "영등등 사무소 소장, 영능력자 카게야마 시게오?"
 "아, 응."
 "뭐가 이렇게 앞에 붙은 말이 많아요? 애초에 영등등이라는 말이 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던 시게오는 이내 꾸욱 입술을 물었다가, 말았다. 질문이 이어졌다. 영능력자라는건 뭐예요? 아이의 시선은 구겨진 명함의 모서리로 향해있었다. 그건, 설명하려던 시게오는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다며 흘러가던 강물 쪽으로 손을 폈다. 잔잔하던 물에 점점 파동이 일더니, 분수처럼 솟아올랐다가, 잘게 부서져 내렸다. 노을빛에 반사된 작은 물방울들이 반짝이며 작은 보석들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에도 보석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비어있던 자리를 차지해 눈동자의 별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것만 같은 표정으로 아이는 시게오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 뺨이 붉었다. 

 "이건 영능력이라기 보다, 초능력인 거죠?"
 "유령도 보려면 볼 수 있어. 제령도 가능하고."
 "지금 한 건 유령의 짓이 아니잖아요? 형이 한 거죠?"

  형…. 익숙하면서도 낯선 호칭에 멈칫했던 시게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까 괜찮냐고 물었죠? 아뇨, 안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는 말에 시게오가 굳은 얼굴을 했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그러니까 형이 도와줘요. 사무소라는 건 상담도 해주나요?"
 "응, 그렇긴 한데. 심각한 일이야?"
 "형에겐 쉬운 일이에요."

 내일 사무소로 찾아갈게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눈에 담았다.
 나이가 적진 않은 것 같은데 성격은 아둔한 것 같고. 사무소를 운영하는 사람치고는 허술한 부분이 있다. 아니, 많다. 예를 들면, 찾아간다는 자신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는 것과 같은.

 "상담 의뢰인의 이름도 안 물어봐요?"
 "아……."

 시게오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묻는다. 이름이 뭐니? 아이는 처음과 다르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악수하자고? 새하얗고 작은 손을 내려다보던 시게오의 귀에, 아이의 이름이 날카롭게 꽂혔다.

 "레이겐. 레이겐 아라타카요."

 



 02.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몸뚱아리로 커다란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 시게오는 발끝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눈물을 쏟아내 버려 말라버린 땅이 결국은 부서져 버린 것이다. 땅 아래는 깊은 어둠이었다. 자신 외의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시게오는 그를 불렀다. 스승님. 저밖에 부르지 않았던 그의 이름을 외치며, 시게오가 눈을 떴다.

 마침 큰 예약이 없는 날이었다. 오전 손님을 떠나보낸 뒤로 시게오가 안절부절못하며 시곗바늘의 움직임만 지켜보고 있자, 그 옆에 떠 있던 녹색 악령-에쿠보는 인상을 쓴다. 예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하지만 시게오에게는 최근 들어 제일 중요할 '예약 손님'을 기다리기에 저렇게 군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온다는 사실에 시게오는 사무실을 분주하게 치웠다. 언제나 책상 한켠에 올려져 있던 액자는 서랍 제일 아래 칸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시계가 4시를 가리키는 순간, 철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린 목소리에 시게오가 저도 모르게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

 그리고 놀란 눈을 한 아이에게 뱉은 인사는 짧았다. 아이는 언제 제가 놀랐냐는 듯이 웃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답했다. 시게오는 저 웃는 얼굴이 가짜라 생각했다. 이른바 영업용 미소. 눈치는 챘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저 아이 나름의 방어이고, 저 얼굴이 깨지는 순간 낯선 이인 자신에게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시게오를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온 레이겐은 눈동자만을 굴려 곳곳을 살펴봤다. 대체로 깔끔하고, 어떻게 보면 건조하기도 한 방이었다. 창문 근처에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방울토마토 화분이 눈에 들어왔을 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또다시 보였다.

 "여기 잠깐 앉아있을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창가에 흐릿하게 뭉쳐져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레이겐을 소파에 앉힌 시게오는 한쪽에 있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차보다는 우유가 좋을까. 어디까지나 시게오의 어릴 적 취향이었지만.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냉장고를 뒤적였지만, 그렇게 찾아낸 우유가 일주일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는 결국 찻잎을 꺼냈다. 뜨거운 물을 끓여 잎을 우리고, 레이겐에게 가져다줄 찻잔에는 얼음 하나를 떨어뜨렸다. 뜨거운 차를 마시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탕비실을 나서면 갈색 뒤통수가 보였다. 그 주위를 에쿠보가 한 바퀴 돌더니 시게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기에 시게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악령은 또다시 한숨을 뱉는다. 

 "조금 더 꾸미면 좋을 텐데요. 포스터라든가."

 시게오가 자리에 앉자마자 레이겐이 건넨 말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시게오가 차를 내오는 동안 사무실을 여기저기 뜯어 본 모양이었다. 방울토마토 말고 다른 화분도 좀 놓구요. 이어진 말에 시게오가 시선을 잠시 창가로 두었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방울토마토. 그저 장식일 뿐인. 오래전 스승이 주었던 그때 그 화분은 아니었으나, 시게오는 종종 마트에서 씨앗을 사다가 맛없는 방울토마토를 피워내고는 했다. 시게오는 충동적으로 초능력을 사용해 방울토마토 하나를 따서 레이겐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레이겐은 별다른 의심 없이 제 앞에 내밀어진 붉은 열매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 시게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이거…….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응. 원래 그래."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상담하고 싶다는 건 뭐야?"

 아무 맛도 나지 않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기에 괜히 불쾌해진 입속을 적당히 따뜻한 차로 헹구던 레이겐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오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허공을 둘러보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시게오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인다.

 "가끔, 알 수 없는 것이 보여요. 희미하게 흐려진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게."

 레이겐의 속삭임과 동시에 시게오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에쿠보를 제외한 영혼은 없었다. 에쿠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겐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항상 보이는 건 아니에요. 레이겐이 덧붙이고는 시게오가 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요. 딱히 해를 끼치지는 않는데 그래도 불안해서요."
 "제령 하기를 원하는 거야?"
 "아직은요. 뭔지 모르니까요."
 "뭔지 알고 나면 제령할 수도 있다는 소리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뭔지 모르니까요. 아직까지는 괜찮았다고 해도 이후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는 거죠."

 레이겐은 호기심에 비례하게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안전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그런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체질이었다고 하기에는 보이는 건 딱 그 그림자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하게는 중학생이 되어 조미시에 이사 오고 나서부터였다는걸 알고 있기도 했다. 보이는 장소나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등굣길의 건널목에서. 때로는 노을 지는 하천 다리 위에서. 때로는, 하교 후 찾아온 수상쩍은 상담소의 창가에서.

 "지금 여기에 귀신이 있나요?"

 레이겐의 질문에 시게오는 저도 모르게 에쿠보를 바라봤지만-레이겐에게는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레이겐이 묻는 '귀신'이 에쿠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여기서도 보였니? 시게오가 꺼내놓은 고급 과자를 슬쩍 레이겐 쪽으로 밀며 묻자, 레이겐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과자를 하나 입에 물고 네. 작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안 보여요."
 "응. 지금은, 나도."

 사실 저급 악령 정도는 사무실 입구에 쳐놓은 시게오의 베리어를 넘어오지 못했지만, 시게오는 굳이 그것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결국, 한동안은 시간이 될 때마다 그림자를 봤다는 장소에 함께 찾아가 원인을 알아보기로 하고 레이겐은 돌아갔다. 시게오는 문이 닫히며 아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제 핸드폰에 저장된 '아라타카'라는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게오, 너……."

 레이겐이 있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에쿠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째서 저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너는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냐? 물론, 입을 여는 건 쉬웠으나 그 수많은 물음을 밖으로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시게오가 에쿠보. 하고 악령을 부르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검지를 세워 코끝에 가져다 댔다. 

 "이제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한숨처럼 내뱉어진 시게오의 참회에, 에쿠보는 결국 열었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03.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교복을 입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켠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한껏 차려입은 어른들 사이에서, 그 사람은 평소와 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스승님. 반가운 마음에 그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큰 손으로 시게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하한다 말했다. 그리고는 오늘은 예약이 있어 같이 라멘 먹으러 가기는 힘들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시게오는 이 이후에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고, 레이겐도 이를 알고 한 농담이었겠지만, 이런 순간까지도 고기가 아닌 라멘을 입에 올리는 게 괜히 웃음이 나와서 시게오는 기쁜 맘으로 인사를 드렸다.

 다음에 뵐게요.

 레이겐은 제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유는 몰랐으나 시게오도 마주 보며 웃었다. 시게오가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레이겐이 대답했다. 그래. 이것이 사제의 마지막 대화였다.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검은 교복을 급하게 찾아 입고 향내 짙은 공간에 도착했을 때, 시게오는 울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하얀 꽃에 둘러싸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많은 이들이 그 곁에 왔다가 떠났다. 시게오는 하얀 꽃과 검은 옷투성이인,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그 얼굴을 바라봤다. 특별한 감상이 있지는 않았다. 영정 사진은 홈페이지에 있던 사진을 썼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옆에 앉아있던 동생을 먼저 돌려보내고, 조금 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쏟아내는 토메를 달래고, 그렇게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위로받는 동안. 시게오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유일하게 이 세상에 두고 간 그의 몸은 화염 속에서 가루가 되어 돌아왔다. 조미시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에 산다던 레이겐의 가족들은 어째서인지 조미시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시게오에게 영등등사무소 열쇠를 넘겼다. '유품'을 정리하기 전에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가져가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잠겨있는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소는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시게오는 벽 한쪽에 있는 게시판으로 다가가, 사진 한 장을 찾아 떼어냈다. 그 안에 있는 자신과 남자의 모습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 고개를 돌려 비어있는 자리를 한 번 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함께 와놓고 뒤쪽에 서 있기만 하던 세리자와가 당황하며 다가오자, 시게오는 드디어 실감이 난 것처럼 울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목 놓아 울었다.

 "사라지는 게 싫어요. 여기도, 스승님도."

 울음 속에 섞인 시게오의 말에 세리자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렸다.
 안녕히 가시라 했으나 그렇게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라 한 것은 아니었는데. 홀로 맘을 정리하고. 홀로 인사를 나누고. 남은 자들에게 아무런 욕심도 없었던 것인지 영혼의 작은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그렇게.
 이별이었다.

 


 04.

 에쿠보는 생각했다. 정상은 아니야.
 십여 년을 시게오의 옆에서 보낸 악령의 감이었지만, 시게오는 요 몇년간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넌지시 무얼 찾느냐 물으면 딱히 찾는 건 없어, 에쿠보. 하는 덤덤한 대답만 돌아왔지만. 그가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꾹 눌러 담아 없애려던 어린 시절의 감정인지, 그립고 그리운 사람인지, 아니면 전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라타카. 거긴 위험해."
 "괜찮아요. 와봤던 곳이니까."

 그것을 이런 식으로 알려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조차 몰랐다. 전생과 같은 육체에 같은 영혼? 거기다가 이름까지 그대로 가지고 태어났다고? 신이 장난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래. '신'의 장난이 아니라면. 저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이런 폐건물에 와봤다고?"
 "딱 한 번이요. 그 유령이 들어가는 걸 봐서."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요? 위험하니까? 알았다니까요. 의외로 잔소리가 많으시네."

 에쿠보가 보기에도 과보호였다. 정작 시게오가 저 나이였을 때는 더 위험한 곳에도 가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이런 악령 조무래기조차 없는 폐건물은 '작은 레이겐'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에쿠보가 그것을 말로 지적하거나 빈정거리지 않은 건 인간이 너무나도 약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더욱더.

 "어때요?"

 폐건물의 2층으로 올라 온 시게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이겐이 포옥 한숨을 내쉰다. 이번에도 없었다는 의미다. 다섯 번째 실패였다. 사흘 째 레이겐이 보인다던 유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겐은 이쯤 되니 자신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안절부절한 기분이 되었으나 정작 시게오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레이겐은 그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령'이 무엇인지 시게오는 점점 눈치채고 있었다.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다녀온 곳은 전부 익숙한 곳이었다. 레이겐에겐 보이지 않았으나 항상 옆에 떠다니던 에쿠보도 이쯤 되면 그 유령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같은 장소에서 두 번 이상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야 했다.

 "아라타카, 같이 갔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좋아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시게오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작은 레이겐, 아라타카는 의심이 많으면서도 사람을 쉽게 믿는 듯해서. 이를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주의를 줘야 할지 고민하는데 조금 전까지 투덜거림을 들었던 터라 결국은 하고 싶었던 말을 꾹 삼켰다. 건물에 쌓인 오래된 먼지가 날리면서 코를 간지럽히길래 우선 밖으로 나가자 하려는 순간, 레이겐의 발밑으로 검은색 무언가가 사사삭 지나간다. 레이겐이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집어삼킨 레이겐이 펄쩍 뛰어올라 시게오의 뒤로 숨는다. 제 코트를 붙잡은 작은 손을 잠시 바라본 시게오가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레이겐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초능력으로 그 벌레를 붙잡아 창밖으로 내보냈다.

 "아……."

 레이겐은 그제야 창피함이 몰려왔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게오를 올려다본다. 레이겐이 붙잡았던 코트는 이미 손에서 놓았으나 어깨를 감싼 시게오의 손은 그대로다.

 "나갈까?"

 어째선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묻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차마 손을 떼 달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05.

 레이겐 아라타카는 마음을 깨닫자마자 바로 접었다. 차마 예쁘게 접을 틈도 없이, 더는 접을 수 없도록 구깃구깃하게 접어 깊숙이 숨겨놓았다. 어쩌다 누군가가 발견하더라도 쓰레기인가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사실 이 마음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쓰레기일 터였다.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14살이나 어린, 란도셀을 메고 찾아온 것이 첫 기억이었던 제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분명 그렇게 숨겼었는데. 최근 제자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눈치챈 레이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도 눈치챈 사람은 시게오 본인이 아닌 레이겐이었으며, 곧 시게오의 중학교 졸업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겐은 계획을 세웠다. 사무실을 이전하든 직장을 옮기든, 조미시를 떠나자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고등학생이 된 시게오는 바빠질 것이고, 레이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돼도 자주 찾아오기는 어려울 터였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불러내지 말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달라붙은 녀석이니 굳이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이어진 생각에 조금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으나, 레이겐은 자조적인 웃음을 입에 머금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집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는 것은 쉬웠으나 사무소 안은 손대지 못했다. 세리자와에게는 한 달 전부터 사무실을 뺄 거라 미리 말을 해뒀지만, 레이겐 스스로가 정리할 마음을 먹지 못했던 탓이다. 정말 우습게도. 한참을 생활했던 좁은 멘션 방 안에는 그 어떤 추억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5년조차 되지 않은, 아니, 심지어 사무소가 불에 타 옮긴 뒤로는 1년도 되지 않은 이 장소에 쌓인 추억이 훨씬 많았기에.
 언제나처럼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상에 턱을 괴고 사무소를 둘러보았다. 접수대라 적힌 시게오의 책상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다. 시게오와 함께 마주 보고 앉아 타코야끼를 나눠 먹었던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시게오와 함께 찍었으나 어쩐지 민망스러워진 기분에 다른 손님 사진들 뒤쪽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었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눈에 담길 것이 너무 많아 레이겐은 눈을 감았다. 

 "다음에 뵐게요."

 시게오의 졸업식, 어쩐지 그리운 학교 앞에서 시게오가 건넨 인사에 레이겐은 차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어 그냥 미소지었다. 습관처럼 뱉으려던 거짓말을 오늘만큼은 목 뒤로 삼켰다. 시게오가 고개를 조금 갸우뚱하더니 따라 미소짓는다. 안녕히 가세요. 여기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을 생각은 없었다.
 내일부터는 정말 사무소를 정리해야 했다. 그러자 어쩐지 잊고 있던 담배 냄새가 생각나 근처 편의점에 들러 한 갑을 샀다.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았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매캐한 연기를 뱉어냈다. 허리 아래밖에 오지 않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는데, 아래쪽에서 아기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구슬프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레이겐이 허리를 길게 빼 난간 아래를 바라봤고, 바람이 불었다. 손에 들린 담배가 바람에 날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몸을 돌리는데 발을 헛디디어 휘청거렸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인가.
 레이겐은 저보다 먼저 떨어져 버린 담배와 흩어지던 담배 연기를 떠올렸다. 그 이상의 생각을 이어갈 수 없어서 레이겐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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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레이] Pumkin Time  (0) 2019.05.20

*pumkin time : 꿈이 깨지고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밤 12시에 마차가 호박으로 바뀌는 Cinderella 이야기에서). 
*18×32
*누군가가 한번쯤 연성 해봤을 것 같은 이야기






 01.

 세상은 조용했다. 하교 시간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내 거리를 지날 때도, 유독 신호에 자주 걸리던 도로에 섰을 때도,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삐빅, 소리와 함께 신호등의 파란 불빛이 켜졌다. 방금 전 떠오르려던 생각을 잊은 채로 허둥지둥 길을 건너면―보였다. 익숙한 건물이. 조잡한 글씨체로 '영등등 상담소' 같은 수상쩍은 이름을 단 그곳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에 가방끈을 부여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면, 다행히-다행인 건가?- 문 앞에 영업중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여어, 모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처럼 데스크 의자에 앉아 귀찮다는 듯이 대충 손을 흔드는 남자가 있었다. 모브, 시게오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앉지그래."
 "아, 네."

 앉으라는 말에 시게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책상으로 가 가방을 내려놨지만, 그의 스승이 일어나 소파로 다가가자 그 맞은편에 앉았다. 간이 테이블에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차가 두 잔 놓여 있었다. 스승님이 타 놓으신 걸까. 시게오가 잠시 생각했지만, 정말로 궁금한 건 이게 아니었다.

 "스승님, 조미시가 너무 조용해요."
 "그래?"
 "오는 길에 아무도 없었어요."
 "아-, 다 같이 독감이라도 걸린 거 아냐? 요즘 유행이니까."
 "아뇨, 아무리 독감이어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는 건 이상하죠. 공기가 이상해서 악령의 짓일까, 라는 생각도―."
 "그보다 모브."

 할 말이 있는거지?
 성의 없이 대답하던 스승, 레이겐은 시게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물었다. 할 말이라면 지금 하고 있잖아요. 라고 생각했지만, 시게오의 입은 달싹일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가만히 그런 시게오의 모습을 언제나의 무표정으로 지켜보던 레이겐이 그런가, 혼자 납득한 듯 중얼거리며 차를 들이켰다. 아직 뜨거울 텐데. 뜨거운 걸 마시지 못하는 그의 스승이 찻잔을 놓칠까 봐 시게오가 당장이라도 초능력을 쓸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지만, 레이겐은 멀쩡한 모습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생각이 안 나?"
 "네?"
 "어쩔 수 없지."

 오늘의 레이겐은 평소와 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사실 '오늘'이라는 날이 무언가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슬슬 퇴근할 건데, 모브.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반쯤 강요와도 비슷한 그의 말에, 시게오는 거절할 생각도 못 하고 네…. 중얼거렸다.




 02.

 레이겐의 집으로 가는 길에도 두 사제를 제외한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오늘은 스승님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시게오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레이겐은 그런 시게오에게 시답지 않은 말을 건네며 걸어갔다. 시게오는 저의 스승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기에는 불안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들어와."

 그러고 보니, 스승님의 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간단한 가구를 제외하면 특별할게 없는 방이었다. 어색하게 현관 앞에 서 있는 시게오를 손짓으로 부른 레이겐이 적당히 아무 데나 앉으라 말하며 정장 마이를 벗었다. 시게오가 머뭇거리며 작은 소파에 앉자, 레이겐은 옷장을 뒤적거리며 하얀색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냈다. 대충 맞을 것 같은데. 씻고 이걸로 갈아 입어. 순식간에 옷을 건네받고 욕실로 떠밀린 시게오는, 잠시 손에 들린 것을 쳐다보다 주섬주섬 교복을 벗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된 18살의 시게오는 14살의 시게오와 달랐다. 꾸준한 운동 덕분에 근육도 붙었고, 4년동안 훌쩍 키가 커버려 저의 스승님과 눈높이가 맞게 되었다.
 덕분에 갈아입으라고 받은 옷은 레이겐의 예상처럼 '대충' 맞았다. 다른 사람의 옷을 입었다는 묘한 불편함을 제외하면 잠옷 대신으로 충분했다. 시게오가 교복을 팔에 걸고 욕실에서 나오면, 레이겐은 어느새 회색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는 욕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제자, 모브에게 묻는다.

 "할 말이 있지?"

 아까와 같은 물음이다. 시게오는 여전히 어느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칼을 타고 흘러 내려온 물방울이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아아-작게 탄식한 레이겐이 몸을 일으키고는 시게오의 어깨에 걸려있던 수건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성의 없는 손길로 머리카락을 헤집는 그에 당황한 시게오가 허둥거리다 결국은 힘을 빼고 몸을 맡겼다.

 "감사…합니다."
 "음…그게 아니지."

 네? 얼빠진 시게오의 목소리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턱을 매만지던 레이겐은 욕실로 들어갔다. 씻으시려는 거구나. 할 말은 뭐지. 남겨진 시게오가 축축해진 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게오는 바로 코앞에 있는 스승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켰다. 싱글 침대는 역시 남자 둘이 자기엔 비좁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바닥에서 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제자의 손을 붙잡아 당기고는 침대에 눕히며 자신도 옆에 누워버렸다. 내일은 어디 좀 가자. 통보에 가까운 말을 하며 레이겐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시게오가 눈을 끔뻑거렸지만, 눈앞의 남자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버렸다.
 역시 오늘 하루는 뭔가 이상해.
 시게오가 살짝 손을 뻗어 금빛 머리를 쓰다듬듯 허공을 휘저었다. 진짜로 쓰다듬을 용기는 없었다. 레이겐의 눈이 잠시 파르르 떨린 것도 같았지만, 스승님의 속눈썹은 금색이네, 따위를 생각하던 시게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몸을 가까이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뿐이었다. 시게오가 슬쩍 스승의 허리를 감싸 안은 이유는. 순간 '할 말'이 생각날 것도 같았지만, 그는 허리를 껴안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




 03.

 멘션을 나선 두 사제의 차림은 어제와, 아니, 평소와 같았다. 회색 정장과 검은 교복 차림.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어디' 좀 가자는 말만 했을 뿐 그곳이 어디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시게오는 이쯤 되니 스승님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더 묻지 않았다. 지하철 개찰구로 향하는 그에게 '전철 타시려고요?'라고 물은 것 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없었기에 운영하는 걸까, 라는 시게오의 걱정이 무색하게 탑승장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는 순간 쿠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전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열린 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레이겐의 뒤를 쫓으며 시게오는 잠시 제일 앞칸에 있을 운전실이 궁금해졌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모브."

 가운데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은 레이겐이 모브를 불렀다.
 
 "네, 스승님."
 "지금 우린 ●●절벽에 갈 거다. 가 본 적 있어?"
 "아뇨, 처음…."

 처음 가봐요. 시게오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깨닫지 못한 순간 입에서 튀어나온 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스승님과 갔었잖아요. 자살 명소로 유명한 관광지라고. 제령 의뢰가 들어와서."
 "그랬지."

 짧게 대답한 레이겐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게오는 잊고 있던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들이닥쳤다.
 많은 이들이 거친 파도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는 절벽. 그러나 노을빛이 아름다운 장소였기에 시간이 흘러 관광지가 되었고, 최근에는 그곳에서 자살하는 이도 없었으나, 다녀간 관광객들에게 자잘한 사고가 생겨 악령의 짓이 아닌지 확인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리고 두 사제는 주말 아침, '오늘'처럼 전철을 타고 그 장소에 갔다. 
 가서…그다음엔?
 기억이 뚝 끊겼다. 정말로 악령이 있었나? 제령하고 돌아왔던가? '그날'은 언제지? 혼란스러워하는 시게오의 머리를 레이겐이 침착하라는 듯이 쓰다듬었다. 어른의 손이었다. 18살의 시게오는 아직 갖지 못한 손. 어젯밤 눈앞의 금발을 차마 쓰다듬지 못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천천히 해. 아직은."
 "스승님……."
 "지금 네 모습 보니까, 가보면 알 것 같고."
 "스승님, 뭔가를 알고 있는 거죠?"

 스승, 레이겐은 대답하지 않았다.




 04.

 기사님 없이도 움직이는 기이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절벽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절벽에 부딪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악령은…없는 거 같네요."
 "그렇겠지."

 지금에서야 눈치챈 거지만, 레이겐이 평소보다 말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곳이 조용하다 느꼈는지도 모른다. 레이겐은 조금씩 절벽의 끝으로 다가갔다. 관광지인 만큼 그 끝엔 가슴께까지 오는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지만, 시게오는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붙잡고 싶다 생각했다. 

 "네가 전부 제령했잖아. 모브."

 나무 울타리에 기댄 레이겐이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자신이 직접 제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시게오의 머리로 다시 한번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확실히 이곳엔 악령이 있었다. 악령이랄까, 원념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목숨을 끊은 이들의 부정적인 감정과 영혼이 어지럽게 섞여 괴물처럼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물론 시게오는 겁먹지 않았다. 다만 서글펐다. 그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었었다.
 아, 그날은 스승님의 32번째 생일이었다. 빈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저녁에 있을 레이겐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해 아침부터 만난 제자는 스승님에게 아무런 축하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일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전할 말이 있었다.

 "기억…났다."

 그래,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을 레이겐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령의 일이 끝난 뒤, 지금처럼 울타리에 기댄 스승님은 물었다.

 "할 말이 있지?"

 레이겐은 시게오의 말을 기다린 것 같았다. 그때의 그는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해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 역시. 말 할 수 없었다.
 
 "말 못해요."
 "모브."
 "하지만, 제가 말하는 순간 당신은……."

 그 날의 일이 전부 떠오르는 순간, 시게오는 지금 자신과 스승이 있는 '오늘'이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때문에 말 할 수 없었다.

 "당신은, 죽는거죠?"

 이곳은 꿈이었다. 시게오가 붙잡아 놓은, 레이겐의 마지막 꿈.
 시게오는 그 날 레이겐에게 고백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백하지 못했다. 그렇게 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을 버스를 탔다. 버스 안 손님은 둘 뿐이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시게오는 레이겐의 어깨에 기대어 우울한 기분으로 잠들었다. 그래서 버스가 미끌어져 절벽 아래로 굴렀을 때 바로 초능력을 쓰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시게오는 따뜻한 품 속에 안겨져 있었다. 마치 그를 보호하듯 껴안은 팔 안에서 고개를 올려다보면 피를 흘리며 옅게 웃는 스승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악령이 제령되기 직전에 내게 저주라도 걸었던거겠지. 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아마 대단한 건 아니었겠지만, 상황이 나빴어."
 "스승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난 모브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시게오가 비틀거리며 레이겐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레이겐은 그런 얼굴마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그의 뺨을 붙잡았다.

 "네가 나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에, 난 아직 너에게 붙들려 여기에 남아있는 거지. 하지만, 모브. 아직 살아 있는 네가 계속 나와 함께 있는 건 좋지 않아."
 "당신이 없으면 어차피 전 제대로 살 수 없어요."
 "거짓말이 늘었구나, 모브 군. 넌 내가 없어도 살 수 있어."

 넌 이 세기의 영능력자―레이겐 아라타카의 제자니까.
 잔인한 말을 뱉는 그도 사실은 잠시, 이렇게 둘만 있는 세상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외롭게 34년을 산 저와 달리, 18살의 제자에겐 많은 이들과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모두 빼앗을 수 없었다.

 "난 네가 해주는 고백, 그것만으로 충분해."
 "스승님―."

 스승님, 저는, 당신을.
 모브가 마지막으로 본 레이겐은, 밝게 웃고 있었다. 




 05.
 
 눈을 뜨면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형, 정신이 들어? 리츠의 물음에 시게오는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자신을 안아주던 스승님의 온기가 생생했다. 그의 대답은 웅웅거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리츠, 스승님은?"
 "……형."
 
 리츠는 머뭇거렸다. 그의 표정이 대답이 되었다. 모브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자 리츠는 당황하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스승님, 스승님. 중얼거리는 시게오의 말이 아팠다. 바늘이 꽂힌 손으로 눈가를 가렸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시게오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간호사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감정을 겨우 추스를 수 있었다.
 누워있는 시게오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진찰하던 의사는 현재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며 자세한 검사를 한 뒤 결과를 보고 퇴원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했다.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시게오는 그런 가족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승님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행이네요. 마침, 중환자실의 환자분도 아까부터 수치가 정상적으로 돌아왔거든요."
 "네?"
 "이대로라면 곧 의식이 돌아올 것 같아요."

 의료 기구를 정리하던 간호사의 말에, 시게오는 놀란 눈으로 제 동생을 바라봤다. 리츠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레이겐 씨, 고비는 넘긴 것 같아. 다행이야. 정말, 큰일이 나면 형에게 어떻게 말하지 하고…. 답지 않게 말을 쏟아냈다. 시게오가 그런 리츠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해하고 나자, 그의 주변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둥실 떠올랐다. 어머, 시게! 그만두렴! 옆에 있던 어머니가 급하게 떠오르는 링거대를 잡아 내리며 외쳤지만, 힘을 갈무리 할 수 없었다. 

 "형, 지금 바로 일어나는 건 그만둬 줘……."

 리츠의 말에 시게오가 겨우 밝은 얼굴로 웃었다. 

 스승님. 제대로 말 할 수 있게 됐네요.
 같은 시각, 레이겐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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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해피로 끝낼지 새드로 끝낼지 고민하다…어떻게든 해피로 마무리 하려니 조금 허술해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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